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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마지막 호흡 

*근친 요소가 있습니다

*자살, 자해, 사망, 우울증 소재 등을 사용하였습니다

절망한 소녀가 있었다. 세상은 절대적으로 시시하고 절망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미처 철이 들기도 전에 배워버린 어린 아이가. 남들이 한 발자국을 걸을 때 열 발자국을 뛸 수 있는 아이였다. 영재라고도 불렸었고, 세상을 호가하는 천재라는 이름도 붙여졌었다. 각종 텔레비전 쇼에 나와 아이의 지능이 얼마나 천재적인지 보여주는 프로그램 촬영만 해도 손가락 열 개는 너끈히 넘길 정도로. 아이큐 200을 가뿐히 넘는 천재적인 지능의 소유자인 아이. 어떤 계산 문제가 주어져도, 대학교 수준의 물리 문제를 쥐여주어도, 눈앞에 놓여 있는 문제를 뚫어지라 바라보다 전부 계산해내었다. 천재였다. 제 2의 아인슈타인이 될지도 모른다며 사람들은 그녀를 넘버로, 재능으로, 그 능력으로 기억했다. 달리 얘기하자면 그녀는 철저하게 그 지능으로만 기억 당했다는 것이 된다.

에노시마 쥰코. 그녀가 어느 날 갑자기 모든 텔레비전 쇼의 출연을 잠정중단하자 그 이름은 까맣게 잊혔다.

잠이 많았다. 언제부터 잠이 많아졌는지는 모른다. 명백한 것은 처음부터 그러진 않았단 것이다. 나름대로 활달했던, 그러나 그것이 옛이야기가 되어버린 쥰코는 폭신한 깃털 베개에 목 뒷덜미를 묻고선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올렸다. 어둠이 잠식한 방 안에는 적막만이 떠돌았다. 지금은 몇시인지, 아니, 오늘은 며칠인지조차 자각이 없었다. 때를 가리지 않고 쳐놓은 두꺼운 암막 커튼은 햇빛을 완전히 차단해주었지만 쥰코의 시간 감각을 잊게 만들었다. 빛 한점 없는 공간에서 창백하게 질린 제 두 손만 어둠 속에서 어른거렸고, 방문 너머로 희미하게 텔레비전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조차 신경이 거슬려 이내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어썼다. 눈을 감고 자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어. 영원히, 이대로 영원히 눈을 감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눈꺼풀이 스르르 감겼다. 그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놓쳤다.

“그거, 혹시 케이크야?!”

“응, 케이크 사 왔어. 우리 생일이잖아.”

무쿠로가 말했다. 그녀는 케이크를 부엌 카운터에 올린 다음 외투를 벗었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세쌍둥이 자매의 생일이기도 했다. 일주일 전에 생일이 다가온다고 들떠있던 료코의 모습을 보았던 거 같기도 한데, 워낙 이 아이는 깜박거리는 게 심하다 보니 그런 료코의 물음이 새삼스럽진 않았다.  23일에서 24일로 넘어가는 자정이었고, 무쿠로는 늦은 퇴근을 마치고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이것저것 사 온 참이다.

“맞다, 그랬었지!”

그제야 제 생일을 기억해낸 료코가 소파에 기대앉은 채로 작은 탄성을 지르더니 깡총거리며 달려왔다. 료코는 촉촉한 시트 사이에 탐스러운 딸기를 잔뜩 머금은 그 케이크를 보고서는 신이 잔뜩 났다. 우리 집 근처에 있는 베이커리에서 사 왔어. 네가 좋아하는 곳. 정말?! 그 집의 생크림은 느끼하지 않게 달곰하고, 딸기도 큼지막하고 신선한 것을 사용한다고 유명했는데, 무엇보다도 료코가 그 케이크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녀는 무쿠로에게 달려가 뺨에 마구 키스를 날리고 쪼르르 부엌으로 들어가 초를 정확히 18개 꺼내왔다. 일주일 전 무쿠로가 다가오는 생일을 위해 사다 놓은 것이었다. 건망증이 심한 료코가 용케 어떻게 그것을 기억해냈는지, 문득 궁금해졌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무쿠로는 료코를 대신해서 초에 불을 붙여주었다. 불이 붙은 초가 가지런하게 케이크 위에 꽂혔다. 무쿠로가 물었다.

“쥰코 쨩은?”

“음, 잘 모르겠는데…. 아마 방 안에 있지 않을까? 오늘 종일 보이질 않았거든.”

잠이라도 자고 있는 걸까? 료코의 말대로 거실 한편에는 굳게 닫힌 그녀의 방문이 보였다. 또 다른 쌍둥이 동생인 쥰코는 료코와 함께 티비를 보고 있거나, 무언가 노트에 열심히 적어두고 있거나, 아니면 따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것이 보통의 일상이었다. 적어도 퇴근하고 돌아오면 그런 모습을 자주 보았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부터 어딘가 무기력한 모습으로. 쥰코보다 더 일찍 자퇴하고 바로 취직한 무쿠로가 집에 돌아오면 항상 그녀가 그런 모습으로 집에 있었다. 꼬박 2년 동안 그랬다. 그런데 오늘은 드물게도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료코가 케이크의 흔들리는 촛불에 정신이 팔려 팔랑팔랑 그 주변을 살폈다. 신기하다! 활짝 웃었다.

그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살짝 웃고선, 문 쪽으로 걸어가 쥰코의 방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었다. 잠겨있진 않았고 대신에 불이 꺼져있었다. 잠이라도 자는 것일까. 탁한 어둠이 무쿠로를 반겼다. 원래는 이렇게 일찍 자는 아이가 아니었는데. 원래는…. 문턱을 넘으니 보일러를 올려둔 탓에 발바닥에 닿은 바닥이 뜨끈했다. 무쿠로는 조심스럽게 침대로 다가가 턱 끝까지 솜이불을 덮은 채로 깊은 잠에 빠져있는 쥰코를 조심스레 흔들어서 깨웠다.

“쥰코 쨩, 자?”

“….”

“케이크 사 왔는데….”

말끝을 흐렸다. 쥰코가 스르르 눈을 뜬 탓이었다. 무쿠로는 왜인지 기가 눌려 나지막이 말했다.

“…18번째 생일 축하해.”

쥰코는 귀찮은 듯이 눈을 다시 감아버렸다. 생일이라는데 별 감흥도 없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이 완강하게 가버리라고 말해주는 듯했지만, 무쿠로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슬며시 쥰코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쩐지 평소보다도 체온이 낮은 것 같았다. 걱정이 되었지만 쥰코가 그런 무쿠로의 마음도 모르는 것처럼 내뱉었다.

 

 

“관심없어.”

 

 

단호하게 딱 잘라 말하는 차가운 어조였다. 돌아누운 쥰코의 엄격한 단호함에 베일 것만 같다. 오늘따라 기분이 안 좋은 걸까, 전전긍긍하던 무쿠로는 손을 떼었다. 더 말을 덧붙이는 대신 머뭇거리며 돌아섰다. 뜻밖에 거절에 얼굴이 홧홧했다. 그래도 다 같이 축하하고 싶었는데, 중얼중얼 말을 삼키다가 문득 등 뒤의 인기척을 느꼈다.

다시 돌아서니 이불을 떨어뜨리며 발목을 침대 밖으로 뺀 쥰코가 두 눈을 완전히 뜨고는 무쿠로를 보고 있었다. 열린 문틈에서 비쳐들어온 빛과 방 안의 어둠이 엉켜 희미하게 드러난 발목이 앙상하게 말랐다. 가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 정말이지 어쩔 수 없네. 절망 언니가 그토록 바라는 것 같으니, 이번 한 번만 특별히 봐주도록 할까?”

“정말?”

무쿠로는 반색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쥰코가 누워서 자는 일이 부쩍 잦아졌었다. 어딘가 기운이 없어 보였고, 분명 깨어있을 이른 시간에도 일찍 잠자리에 드는일이 많아졌던 게 떠올랐다. 피곤한 거겠지? 방금도 피곤해서 그렇게 반응한 게 틀림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렇게 나와줄 거였으면서. 역시 내 동생 쥰코야. 사실은 이렇게나 상냥한데.

이불을 침대 한 쪽에 제쳐두고 쥰코가 침대를 떴다. 갑자기 일어나자 현기증이 나는지 잠시 비틀거렸다. 괜찮아?! 힘이 빠진 손길이 무쿠로에게 기대온다. 무쿠로가 그런 그녀를 부축해주어 거실까지 바래다주었다. 료코가 조심스럽게 불을 붙인 케이크를 가지고 왔고 (비록 중간에 발이 걸려 넘어질뻔한 것을 무쿠로가 초인적인 신체능력을 발휘해 잡아주긴 했지만 말이다) 쥰코는 등받이가 있는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방금까지 자고 있었던 것을 드러내듯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쥰코는 제 푸른 시선을 일렁이는 초에 고정하고 있었다. 유리로 된 탁자 위에는 케이크 외에도 맛있는 향이 풍겨오는 피자와 치킨을 준비해두었다. 역시 무쿠로가 사 온 것이다. 거실의 불을 끄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며 촛불을 후, 불어 없애는 동안에도 쥰코는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좁혀진 미간과 가느다랗게 말려올라간 그녀의 눈썹, 그리고 어딘가 불만족스러워 보이는 표정. 눈치가 빠르지 않은 료코는 거실 불을 켜고 즐거워하며 제 휴대폰을 꺼내 케이크의 사진을 연달아 찰칵찰칵 찍어내었지만, 반면에 무쿠로는 쥰코의 눈치를 살피고는 황급히 잇새를 여몄다. 그러고 보니 쥰코는 제 생일을 달가워하는 법이 없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쥰코는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 딸기네.”

“…, 혹시 별로야?”

“아니. 별로 흥미는 없달까, 왜 하필이면 딸기를 사 왔는지 궁금해서. 절망 언니.”

“그야 네가 유일하게 질리지 않는 맛이라고 했잖아.”

“…그랬어? 기억도 안 나는데.”

쥰코가 다시 슬며시 접시로 눈길을 떨어뜨렸다.

절망 언니라는 경멸하는 명칭으로 불리는 것은 익숙했다. 지긋지긋해 보이는 그녀의 표정을 실망을 한 것도 아니었다. 무쿠로는 한 번도 쥰코에게 뭔가를 바란 적은 없었다.

생일 파티는 매년 열었지만 그때마다 쥰코는 그다지 기꺼워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료코는 곧잘 자기 생일이 다가오는 것조차 잊어버려서 무쿠로가 케이크를 사 올 때마다 늘 똑같은 표정으로 활기차게 뛰어오곤 했다. 덕분에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무쿠로가 케이크를 사는 기쁨을 꼬박 3년 전부터 알았다. 그러나 쥰코는, 료코와는 다르게 케이크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뻔하게 예상이 가는 맛이라서 별로라고 하던가. 그래도 성년이 되는 해이니 기꺼이 기뻐해 주리라고 생각했는데…. 게다가 유일하게 흥미가 가는 맛이 딸기라고 했던 걸 무쿠로는 몇 해 동안이나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후회처럼 생각을 케이크와 함께 삼켰다.

쥰코는 상 앞에 펼쳐진 자신의 생일 케이크를 무료하게 바라보았다. 무쿠로가 가지런하게 여섯 조각으로 잘라둔 딸기 케이크에 생크림이 먹음직스럽게 켜켜히 쌓여있다. 집은 포크로 케이크의 빵조각을 찍어 입으로 가져가면서도 질린다는 표정은 여전했다. 입안에서 빵조각과 생크림, 그리고 달콤한 딸기 과즙이 엉겨서 사라지는 감각조차도 반기지 않는 것 같았다. 료코가 생크림을 뺨에 흠뻑 묻히고 케이크를 냠냠 먹고 있음에도 무쿠로는 쥰코의 눈치를 살피느라 체한 것처럼 속이 거북해졌다.

 

 

“케이크 맛있어!”

 

 

접시를 깨끗하게 비운 료코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셋 중에서 제일 빠르게 제 몫의 케이크를 해치운 료코는 예의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무쿠로에게 고맙다고 연신 헤실거렸다.

 

 

“맛있게 먹었어?”

“응. 역시 이 베이커리가 엄청나게 맛있어. 딸기도 커다랗고 신선해서 더욱 좋은 느낌.”

“맛있게 먹었다니 다행이네. 쥰코 쨩은…, 어때?”

 

 

접시에서 케이크 덩어리를 깨작거리고 있는 쥰코에게 물었다. 그 말에는 은근한 기대도 담겨있었다.

 

 

“흐응. 어떻냐니, 이런 맛 이미 절망적일 정도로 예상이 간다고? 당연하잖아. 썩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걸.”

 

 

포크로 접시 한쪽을 긁어내며 쥰코가 대답했다.

“아…, 썩 나쁘지도 않다는 건, 그래도 나아질 여지가 있다는 의미인 거라고 생각해도 된다는 것…?”

“아아, 정정해두도록 할까. 나빠. 기분 나쁠 정도로 나쁘다고. 입안에서 뭉개지는 이 식감, 별로야. 너무 뻔해. 다 똑같아.”

그 말을 끝으로 쥰코가 포크를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조금의 희망을 가졌던 무쿠로가 상심했다. 쥰코는 바람처럼 일어나 자신의 식기를 싱크대에 가져다두었다. 파티의 끝을 알리는 막이었다. 방문 사이로 사라져버린 쥰코의 빈 자리가 덩그러니 소파에 남았다. 료코는, 머뭇머뭇 어찌할 바를 모르며 무쿠로의 어깨를 감싸주었지만 무쿠로의 멍한 시선은 도무지 쥰코의 뒷모습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23일에서 24일로 넘어가는 자정.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

 

 

 

무쿠로는 소파에 앉아 졸고 있었다. 무쿠로는 침대보다 소파에서 자는 걸 더 선호했는데, 그건 지금보다 더 어렸던 시절에 여러 캠프에서 활동했었던 습관 때문이다. 어렸을 때 활동적이었던 편인 무쿠로는 캠핑을 좋아했고, 때문에 되려 궃은 곳에서 자는 것에 더 익숙했다. 잦은 야근으로 피곤한 정신이 꿈 속을 마구 헤맸다. 여러가지 꿈을 꾸었던 거 같다.

무쿠로는 인기척이 귓가에서 뭉개지는 것을 알고 잠결에 깨어 현관 쪽을 바라보았다. 사람의 기척에 따라 자동으로 켜지는 등에서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다. 운동화를 반쯤 구겨신은 쥰코가 옷걸이에 걸어두었던 제 코트에 팔을 꿰어넣는 채였다. 졸린 포도색 시선이 새벽 4시를 알리는 전자 시계의 활자에 가서 붙었다. 무쿠로가 잠꼬대처럼 말했다.

“쥰코 쨩, 지금 시간도 늦었는데….”

 

 

어디 가? 어물어물 중얼거렸다.

 

 

“…, 금방 돌아올거니까 걱정 하지마.”

 

 

차분한 어조였다. 평소라면 절망 언니는 신경 쓸 필요 없다고 한 마디 날려줄 법도 했는데, 대신에 사근사근하고 부드러운 어조가 무쿠로를 안심시켰다. 듣기 드문 어투였다. 세상에서 제일 아끼고 사랑하는 동생에게 구박을 받는게 익숙한 무쿠로는 그게 그저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금방 눈을 감아버렸다.

“응…,”

무쿠로는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무쿠로는 현실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현관문이 찰칵, 하고 닫히는 그 순간까지 전부. 쥰코가 나지막이 생일 축하해, 하고 덧붙이던 음성도.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현실이었다. 현관문을 닫고 나온 쥰코가 엘레베이터로 향했다. 외투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은 채로. 

***

에노시마 세 쌍둥이가 사는 곳의 머지 않은 곳에 커다란 강이 흐른다. 스미다 강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도쿄 전체를 관통하는 스미다강은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며, 아라카와 강 서쪽으로 돌아 도쿄 만으로 흘러들어간다고 익히 알려져 있다. 27km에 이르는 이 강에는 총 26개의 다리가 존재한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사쿠라바시라는 다리는 도쿄 스카이트리에서도 훤히 내려다 보였는데, 거대한 도시의 양쪽을 이어주는 그 다리가 X표시로 강을 가로질러 놓였다. 스미다 공원과 스미다 강을 이어주는, 보행객들을 위한 통로였다. 벚꽃이 피는 기간에는 관강객들과 봄을 즐기는 사람들이 몰려 혼잡할 공간이었으나 지금은 겨울이었다. 무엇보다도 새벽이 깊어가고 있었다. 쥰코는 아무런 방해도 없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인적이 드문 다리 위로 성큼성큼 걸어간 쥰코가 이윽고 난간 앞에 섰다.

도쿄의 야경은 요란한 불빛들이 뒤엉켜있다. 물에 반사된 불빛이 어른어른 흔들린다. 마치 아지랑이처럼.

하필이면 때묻은 추억이 뇌리 한켠을 어른거린다. 어린 시절 멋모르고 엄마와 손을 잡고 쌍둥이 언니들과 이쪽으로 나왔던 기억이 제일 먼저, 우연히 풀었던 아이큐 검사지에서 200을 넘는 수치가 나왔던 것이, 순식간에 유명인이 되어 남의 입에 오르락 내리락 했던 그 기억이. 한때 키즈 모델로도 활동 했었던 과거가 파노라마처럼 느리게 이어진다. 하지만 그중 무엇도 그립진 않았다.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기억력 탓에 하필 지금 이 순간 그 기억들이 떠오른 것이 원망스러울 뿐. 멋모르고 세상 모르게 자고 있을 료코와 무쿠로를 떠올렸다. 가장 사랑하지만 혐오스럽기도 한 대상. 미안하다는 감정은 들지 않았다.

소매를 걷었다. 팔목을 감싸던 외투의 소매자락을 당기자 선명한 붉은빛 상흔이 가로등 불빛에 흠뻑 젖었다. 자해를 언제부터 시작했는지도 까마득하다. 엄마가 죽고 무쿠로가 가장의 노릇을 자처했을때부터? 어렸을때 벌어들인 돈을 친척들이 가져가 자신들을 보호해준다는 명목으로 전부 탕진했을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예상했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때? 그 수많은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칼로 손목을 그었다. 잘 벼려진 날붙이가 살갗을 파고들며 남기는 싸한 감각과 흘러내리는 피가 기분이 좋았다. 쥰코는 그 감각에 절망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세상은 뻔하고 시시한 거라, 쥰코는 유일하게 뻔하지 않은 그 절망에 온 몸을 맡기기 위해 무엇이든 했다. 자신을 서서히 잠식하는 우울감이라는 늪에서 나오는 대신 서서히 그 늪에 발가락부터 담궜다. 발 끝부터 가랑비에 젖듯이 우울에 좀먹혔었다.

천재라는 이명 아래에 쌓아올린 유명세도 덧없었다. 학교에 가도 전부 자신을 아는 체 하는 녀석들 뿐이다. 그들의 속내는 빤하게 읽힌다. 한때는 전부 죽여버리고 싶다고 충동적으로 생각했으나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만약 이런 세계가 아니라 다른 시간선이었다면 쥰코는 다르게 행동했을지도 모른다. 쥰코는 자신의 노트에 여러가지를 적곤 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영화에서나 이루어질법한 살인 게임의 주최를 상세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그 계획에 너털웃음만을 뱉다 베개에 제 얼굴을 파묻곤 했다. 무력하다. 한없이 무력하다…. 천재적이라는 지능을 가지고도 이런 세상에 태어나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좋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규모가 큰 회사를 나와 돈을 버는 일이라니. 세분화한다면 할 수 있는 일도 셀 수 없이 많겠지만 결국은 전부 비슷한 결이다. 우습다. 그런 생각을 한 그 순간 그녀는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어느 순간부터 깨어있는 시간보다는 자는 시간이 많아졌다. 한번도 생일이라는 사실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상을 가득 채운 생일 음식들을 보면 식욕보다는 구토감이 먼저였다. 먹은 건 전부 식도를 다시 꾸물거리고 타고 올라와 게워내야했다. 자정에 먹었던 케이크도 변기에 전부 토했다. 고등학생때는 타이레놀을 10알 정도 삼키고 몽롱한 의식 속을 헤매다 응급실로 실려갔고, 눈을 뜬 순간 자신이 예상한대로 죽지 않았음에 저주스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한번도 무쿠로와 료코 앞에서 그런 것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이제 그 따분한 나날들도 끝이다. 전부 종말이다. 매년 마주하기 버거웠던 생일이라는 이름의 크리스마스 이브에게 이별을 고할 시간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 도쿄의 밤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쥰코는 천천히 다리 난간의 널찍한 부분에 아슬아슬하게 발을 걸쳤다. 몸이 금방이라도 난간 너머로 넘어갈 것처럼 기우뚱 불안하게 흔들렸지만, 곧 중심을 잡고 그 위를 올라탈 수 있었다. 두 발로 곧게 난간 위를 딛은 쥰코가 반짝거리는 밤의 도시를 올려다 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칠흑처럼 깊고도 넓은 강을 경계선 삼아 야경이 빛났는데, 거대한 빌딩들의 그림자가 물 속에 잠겨 마치 쥰코를 부르는 듯 손짓하는 것처럼 보였다. 관강객들로 북적였을 도쿄의 스카이트리도 올려다 보였다. 시선은 이윽고 하늘에 닿았다. 야속하게도 흐린 하늘에 별이 보이지 않았다. 절망적이네. 낮은 중얼거림이었다. 그녀는 시린 겨울 바람을 정면으로 맞고 있었다.

잔바람이 불어와 분홍빛이 도는 금발을 잔뜩 흐트렸다. 양갈래로 묶은 머리칼이 바람결을 따라 부서지듯 흩어지며 휘날리는데 그게 외려 즐거웠다. 이게 마지막이야. 그런 생각을 하니 절망적으로 지루하고 질리는 이 세상의 뻔한 풍경마저도 멋져보였다. 바람을 맘껏 만끽하던 쥰코는 마치 도시를 구경하는 이방인처럼 난간 위를 자유롭게 거닐었다. 만약 누군가가 그 모습을 보았다면 당장 그녀에게 그만두라고 소리쳤을지도 모르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새벽이 깊었고 거리의 인적이 드물었다. 크리스마스 당일인 것 치고는 지나치게 평화롭고 고요하다.

이윽고 그 고요를 벗삼아 유유하게 한 발을 허공으로 내딛었다. 자유롭게 날아오르려는 새처럼 두 팔을 활짝 벌린채로. 그녀는 황홀하게 웃었다. 한번도 이렇게 활짝 웃어본 적이 없다. 적어도 절망을 알아버린 그 순간부터는 한번도. 그 힘찬 미소에 금방이라도 힘있게 날갯짓하며 허공으로 부유할 것처럼 보였다. 소리내어 크게 웃었다. 뒤이어 그녀는 있는 힘껏 발 끝에 무게를 실어 날아올랐다. 아니.

그녀는 날아오르는 대신 추락했다. 온 몸을 던져 그 심연을 알 수 없는 강으로. 공중을 밟은 발 끝이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으로 미끄러졌고, 그녀는 그대로 물 속으로 빠졌다. 빠진 자리에 한 톨의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았다. 대신에 물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왔다.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익사였다.

***

퉁퉁 불은 시체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 소식은 곧 도쿄 전역에 퍼졌다. 신원 미상의 시체였고, 혹시라도 누군가 유기한 시체일까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미제로 남은 과거의 살인 사건들이 재조명되며 금세 떠들석해지는가 싶었다. 경찰은 실종신고가 들어온 가족들을 불러 신원을 확인하고 있다고 했다. 웹에서 여러 이름들이 거론되었지만, 넷이라는 것이 흔히 그렇듯이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았다. 뜬 소문만이 무성했다. 하지만 허무하게도 진실은 금세 밝혀졌다.

경찰에서 신원 미상의 시체가 자살로 인해 죽었다고 발표했다. 관심은 금방 사그라들었다. 의외로 시시하구만. 한 익명의 네티즌이 인터넷에 멋대로 지껄였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전혀 시시하지 않았다.

무쿠로는 하얀 부검실에 서 있었다. 사라진 쥰코의 행방을 찾아주겠다며 자신을 안심시켰던 경찰이 무쿠로를 이곳으로 안내했다. 파란색 가운을 입은 부검의가 하얀 천을 걷어내자 퉁퉁 불어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된 시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쿠로는 한번도 익사체가 어떤 모습인지 본 적이 없었다.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심하게 손상된 시체였다. 평소 비위가 강한 무쿠로마저도 속이 메슥거렸다. 그렇지만 벚꽃을 닮은 빛깔의 머리카락만큼은 누구의 소유인지, 무쿠로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허공에서 땅이 푹 꺼지는것만 같은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신음이 터져나와 온 폐부를 격렬하게 적셨다. 부정하고 싶었으나 붉은 매니큐어가 발린 손가락이 시선에 걸려 도무지 떨어질줄을 몰랐다. 물을 흠뻑 머금은 그 사체는 쥰코가 평소 즐겨입는 복장을 하고 있었다.

“…제 여동생, 에노시마 쥰코가 맞습니다.”

확인을 해주는 목소리가 떨었고, 눈치를 살피던 경찰이 휴지를 내밀어주려고 하는 것을 거절했다. 저 사람들은 이런 일이 익숙할까. 사인이 익사이며, CCTV 참고 결과 자살임이 분명하다고 마지막 못까지 내려쳐졌다. 유서조차 없는 명백한 자살이었다. 부검실을 나온 무쿠로는 자신이 어떻게 걷고 있는지조차 잊어버렸다.

사쿠라바시 부근, 스미다 강에서 떠오른 시체라고 했다. 텔레비전을 넘기며 들려온 이름모를 사망 소식에 그만 무쿠로의 손가락이 멈췄었다. 애써 쥰코가 아닐거라고 주워섬기며 채널을 돌렸다. 리모콘을 쥔 손이 떨리는 것을 절박하게 외면했었다.  아닐거야. 무쿠로가 말했다.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그러나 쥰코가 사라진 날이기도 했다. 채 씻지 않은 식기가 싱크대 위에 쌓여있었고 옷걸이에서 쥰코의 외투가 사라졌다. 그제서야 무쿠로는 그날 자신에게 상냥하게 말을 건네주었던 쥰코의 어투가 꿈이 아니었던 것을 깨달았다. 드물게 차분했던 그 말투. 그건 마지막을 알려주는 경보음같은 거였을까.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필사적으로. 사랑하는 동생을 평생동안 믿어왔던 무쿠로였기에 이번에도 그저 믿었다. 쥰코를 찾아 거리를 헤매면서도 그녀의 믿음은 가슴속에 있었다. 불안해하는 료코를 다독이며 안심시켰다. 아니, 어쩌면 안심시키려고 했던 것은 료코가 아니라 본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돌아올거야. 목소리가 힘없이 늘어졌다.

경찰의 연락을 받은 것은 생일에서 딱 일주일이 지난 시점이었는데 우연히도 그 해의 마지막 날이었다. 티비에서 보았던 그 익사체가 자신의 동생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에 무쿠로는 반쯤 정신이 나가 일단 집을 박차고 나갔다. 경찰이 불러준 주소로 곧장 택시를 탔고, 값비싼 요금이 나왔어도 무쿠로는 군말없이 지불한 후 부검실이라는 곳의 복도를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아닐거라고, 아닐거라고. 료코를 안심시키던 메마른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에노시마 쥰코는 죽었어. 그 목소리가 말했다.

무쿠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해로 넘어가기 직전의 하늘은 대체로 맑고 청명했다. 마치 그리운 그 애의 눈동자처럼.

***

생각 해보면 말이다, 그 애는 어렸을때부터 무엇이든 질려했다. 그건 아마도 그 애가 타고난 높은 지능의 부작용 같은 거였을 것이다. 어렸던 무쿠로는 몰랐지만 지금의 무쿠로는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사실 제대로 이해는 가지 않았다. 무쿠로는 머리가 월등하게 뛰어난 편은 아니었으니까. 같은 배에서 태어난 세 쌍둥이라지만 어떻게 그렇게도 달랐는지. 머리를 쓰는 일보다는 몸을 쓰는 걸 좋아했던 무쿠로는 동네의 드센 남자아이들과 놀다가 무릎을 다쳐오는 일이 많았다. 반면에 료코는 자주 깜박거렸고, 자주 덜렁거려 조금 까분다 하는 아이들의 먹잇감이 되곤 했다. 료코가 어디선가 쥐어박혀와 울면 무쿠로가 뛰쳐나가 범인의 멱살을 잡고 끌고 돌아왔다. 그러면 그 범인은 더한 꿀밤으로 인해 커다란 혹을 머리에 달고 돌아가야만 했다. 무쿠로는 말하자면 세 자매의 행동대장이었다. 무엇이든 무력으로 척척 해결해낼 수 있는. 실제로 무쿠로는 자신의 주먹을 그 어떤 어른보다도 더 믿었다.

하지만 세상에서 두려울 게 없었던 무쿠로마저도 어찌할지 몰랐던 게 있다. 쥰코는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는데, 무슨 촬영 같은게 많아서 그렇다고 엄마가 설명해주었다. 쥰코 쨩은 아주 유명해서 지금 많이 바쁜거야. 제 막내 동생을 유난히 아끼던 무쿠로를 그 목소리가 달랬다. 무쿠로와 료코가 아무리 엄마를 보채도 쥰코가 집에서 머무르는 일이 손에 꼽았다. 그래도 마냥 좋았다. 동생을 보는 날이. 하지만 언젠가부터 두려웠다. 눈동자 때문이었다.  

그 어느날이었다. 쥰코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엘레베이터 대신 계단을 껑충껑충  단숨에 달려내려가 쥰코를 보러갔다. 쥰코가 예쁜 복장으로 커다란 검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무쿠로는 감탄했다. 역시 내 동생이야! 손을 세차게 흔들었지만 이쪽을 봐주는 쥰코의 표정에는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쿠로는 문득 쥰코가 참 심심해보인다고 느꼈다. 어린 아이의 어휘로서는 퍽 적절한 묘사였다. 쥰코는 늘 심심해보였다. 무쿠로가 참 재미있어 했던 게임도, 장난감도, 그리고 칼싸움 놀이도. 쥰코는 그 어느것도 재밌게 여기지 않는듯 했었다. 쥰코는 이쪽으로 걸어와 무쿠로를 무시하고 그대로 지나쳐버렸고, 무쿠로는 망연히 엘레베이터의 버튼을 누르는 쥰코의 어여쁜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띠딩, 하는 음이 스쳐오면 어느덧 쥰코는 닫히는 문 사이로 사라져 있었다.

그날 밤 무쿠로는 쥰코의 방으로 몰래 숨어들어갔다. 화려한 공주님의 침실처럼 꾸며진데다가 에노시마 가족이 사는 집에서 제일 큰 공간이었다. 침대에는 심지어 핑크색의 벨벳 커튼까지 달려있었다. 료코가 가지고 싶다고 말을 꺼냈다가 무진장 혼났던, 비싼 침대 장식이다. 쥰코는 그 커튼을 닫지 않고 열어둔 채로 자곤 했다. 무쿠로가 커튼이 닫히지 않은 침대에 올라와 조그마한 손을 꼼지락거렸다. 쥰코 쨩…? 어린 티를 벗지 못한 목소리가 유리구슬 굴러가듯 질문했다. 그러면 쥰코는 돌아누워 있다가 이쪽을 보았다. 무쿠로는 그 눈동자를 보는 것을 두려워했다. 세상이 무너져도 무서울게 없었던 어린 무쿠로가 유일하게 두려워하던 것. 마치 세상의 끝을 보고 온듯한, 그 텅 비어버린 짙푸른색 눈동자. 그리고 그 눈동자를 보는 날이면 쥰코는 늘 무쿠로를 절망언니라고 불렀다. 경칭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싫진 않았다.

 

 

“절망 언니, 뭐하러 온거야?”

쥰코가 귀찮은 듯이 물었다. 그다지 답변을 궁금해하는 기색은 아니었지만 무쿠로는 무엇이든 쥰코에게 다 말하고 싶어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냥, 보고 싶어서….”

“에, 이 몸이 보고 싶었다고?”

대답하는 대신  쥰코의 침대 위에 꾸물꾸물 기어올랐다. 조그마한 손으로 침대보를 잡고 올라온 무쿠로가 곁에 누워도 쥰코는 내버려두었다. 그러면 무쿠로는 이불 속에서 쥰코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체온이 낮은 손이었다. 차가운 손을 만지작거리며 무쿠로가 물었다.

“촬영은 어땠어?”

“재미없었어.”

목소리가 퉁명스러웠다. 따라올 부연 설명을 기다리지 않는 편이 좋다는 걸 익히 알기 때문에 따로 설명을 보채지는 않았다. 대신에 무쿠로는 제 손에 쥔 차가운 손을 더 힘있게 쥐어주었고, 별다른 저항감이 없음을 알았을때 안심했다. 쥰코의 눈동자가 천장을 향해 있음을 알고 따라 제 시선을 올렸다. 드물게 쥰코가 덧붙였다.

“전부 그만둘거야.”

“전부?”

“응, 다 절대적으로 질리는걸.”

언젠가는 전부 말이야. 단조로운 톤으로 말하며 눈꺼풀을 닫았다. 무쿠로는 쥰코가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어떤 거대한 슬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때는 무엇을 그만두겠다던 것인지 정확히 몰랐던 것 같다. 촬영의 이야기를 했으니 촬영을 그만두겠다는 이야기일 것으로만 알아들었다. 실제로 쥰코는 얼마 안가 자신이 출연하던 모든 영재 프로그램 및 키즈 모델로써의 촬영을 중단했고, 무쿠로는 엄마가 쥰코에게 울며 불며 난리치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쥰코는 입을 꾹 다물고 화를 내던 엄마의 얼굴을 오래도록 뚫어보았을 뿐이다. 무쿠로는 그 눈길에서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애석하게도 슬픈 예감은 언제나 틀리는 법이 없었다.

쥰코가 제 일을 그만두고 얼마 안가 원인불명의 사인으로 인해 사망했다. 무쿠로는, 자신의 이름 앞으로 남겨진 유산을 친척들이 모두 가져가버렸을땐 알았다. 아, 내가 이 아이들을 지켜야만 하는구나. 자신의 동생들을 모두 아꼈지만, 특히나 쥰코는 무쿠로에게 각별하게 여겨졌다. 다시는 그 비어버린 눈동자를 보고 싶지 않다고 느꼈을만큼.

어쩌면 동경했는지도 모른다. 왜일까? 늘 동네 아이들과 싸워 옷을 버려오는 자신에게 내려지던 꾸지람을 생각해보면, 자신과 정반대인 쥰코는 마치 도달해야 할 어떤 이상향처럼 느껴졌기에?. 선머슴 같은 옷차림을 입었던 자신과는 달리 마치 인형과 같은 차림에다, 이목구비가 어린 아이치고 수려하고 고와서 기획사 스카웃까지 왔었던 쥰코. 활동적인 무쿠로가 단발로 짧게 잘라버린 머리카락에 비해서, 길고 예쁘게 길러 양갈래로 묶어내린 헤어 스타일까지. 쥰코는 마치 공주님이었다. 모두들 똑똑하고 흠잡을데 없는 쥰코를 칭찬했고, 무쿠로는 그런 쥰코를 보며 동경했다.

아니다. 사실이 아니다. 사실은…. 

사실은 사랑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를만큼 까마득하게 오래.

그리고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다. 에노시마 쥰코는 자신의 생일인 크리스마스 이브에 자살했다. 이제서야 무쿠로는 언젠가는 전부 그만둘거라던 쥰코의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료코 쨩.”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료코를 불렀다. 장레식을 치르고 나오는 길이었다. 고인이 살아생전에 인연을 이어나가던 사람이 없어 장례식은 그야말로 텅 비어있었는데, 그나마 무쿠로의 회사 동료 몇명이 얼굴을 비쳐주어 완전히 사람없는 장례식이 되는 것만큼은 면했다. 유산을 들고 튀어버렸던 친척들이 얼굴을 내밀지 않은 것은 뻔히 예상되었기에 무쿠로는 실망하지 않았다. 쥰코가 생전에 사진 하나 남기지 않아 영정 사진은 어릴때 찍었던 키즈 화보로 대체했다. 그 사진 속에서는 어린 쥰코가 예쁜 옷차림으로 말갛게 웃고 있었다. 피어오르는 향의 연기 사이로, 쥰코는 사진 속에서 참 평온해보였다. 부검의가 흰 천을 걷어내던 순간을 떠올렸다. 심하게 일그러진 사체였건만 쥰코의 올라간 입꼬리만큼은 똑똑히 알아보았다.

“응, 무쿠로 언니.”

료코는 품에 항아리 하나를 소중하게 껴안고 있었다. 그것은 세상에 남겨진 쥰코의 마지막 흔적이었다. 그들은 재가 담긴 항아리를 들고 스미다 강 부근으로 향했다. 새해를 갓 넘기고 휴일도 전부 끝난 거리는 북적이지 않았다.

“쥰코 쨩은…. 이제 편해졌겠지.”

무쿠로가 중얼거렸다. 강가에 다다른 료코는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단정하게 검은 상복을 입은 제 모습이 무쿠로와 함께 물 위로 어른어른 비쳤다.

그건…. 대답할 말을 우물거리다가 료코는 떠올렸다. 물 속에서 버둥대며 천천히 익사했을 쥰코를. 코로, 목구멍으로, 호흡대신 물을 빨아들이며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었을 것이었다. 폐부에 물이 가득 차올라 턱 끝까지 메워진 채로. 뼈까지 시려오게 하는 차가운 물 속에서 저체온증과 함께 사망했겠지. 언젠가 웹에서 스치듯 본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 TOP 10이라는 게시글에 익사와 분사가 앞다투어 순위권에 올라와있던 것이 기억났다. 쥰코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고통스러운 죽음을 선택할 정도로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절망적이었던 것일까. 강에 온 몸을 던져 천천히 죽어가는 길을 선택할만큼. 

유서 한장 남기지 않았지만 무쿠로와 료코가 타살이 아닐거라고 생각한 이유는, 쥰코가 늘 입버릇처럼 이 세상이 지겹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쥰코는 이 세상에 퍽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 응.”

료코는 겨우 입술을 열어 대답했다. 그리고 얼른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늘에 걸린 햇살이 그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따사롭게 뺨을 만진다. 어느덧 쥰코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던 다리인 사쿠라바시에 다 도달했다. 무쿠로는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내 입술을 닫은채로 묵묵히 다리 중턱까지 걸었다. 항아리는 여전히 료코의 품에 안긴채였다.

난간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띵한 현기증이 몰려왔다. 그제서야 실감이 난 탓이다. 죽은 쥰코를, 자신이 직접 목숨을 끊은 곳으로 돌려보내줘야 한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쥰코가 자살한 곳에 그녀의 잿가루를 뿌리는 것을 반대했으나 료코로써는 드물게 고집을 부렸다. 쥰코 언니는 그곳으로 돌아가야만 해. 그게 언니가 바라는 일일거야…. 그래서 하필이면 그런 장소를 고른걸거야. 무쿠로는 네가 뭘 아느냐고 언성을 높였지만, 늘 무쿠로에게서 보호받는 위치였던 료코가 어째서인지 물러서질 않았다. 결국 무쿠로는 제 고집을 먼저 꺾었다. 그렇게 해서 재는 사쿠라바시 다리 위에서 뿌리기로 결정했다. 밤에 보면 도쿄의 야경이 고스란히 스미다 강에 비쳐보인다는, 도쿄 스카이트리 부근에서.

그들은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멈춰서서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심해처럼 깊고 푸른 강이 겨울 바람을 맞아 물결을 흔들었다. 그리운 누군가가 떠오르는 그 빛깔에, 둘은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오랜 적막 속을 뚫고 잔바람이 불었다. 무쿠로는 입술을 한번 달싹이다가, 잇새를 부딪혔다가, 눈길을 떨어뜨렸다가, 료코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 있지.”

“….”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었어.”

“응.”

료코가 대답했다. 

“사실… 사랑했던거야.”

“…….”

“오랜시간 동경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말이지….”

“언니….”

“이제야 깨달았어.”

무쿠로가 입술을 깨물었다. 마지막 말을 쏟는 것이 힘겨워보였다. 채 엎지르지 못한 말이 입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료코는 그저 조용히, 무쿠로에게 자신의 품 속에 들려있던 항아리를 건네주었다. 항아리를 건네받은 무쿠로가 마침내 마저 말을 이었다.

“절대 사라지지 않는 이 슬픔이 내 사랑이었어.”

료코는 그 말을 조용히 숨을 죽여 듣기만 했다. 파도처럼 일렁거리는 포도색 눈가에서, 그리고 색이 깊은 주근깨가 흩어진 뺨에서 붉은 기가 감돌았다. 마치 울것처럼. 료코는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미 죽어버린데다가 제 혈이 닿은 친족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무쿠로가 어떤 심정인지 도저히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어떤 말을 해야할지도 몰라 붉은 시선을 바닥에 떨어뜨리며 고개를 돌려버렸을 뿐이다. 무쿠로도 그것을 아는지, 떨리는 목소리를 다음과 같은 말로 여몄다. 

“네가 내 말을 이해 해줄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으니까… . 아무래도 좋아. 그냥… 마지막으로 이 아이를 보내주기 전에 말하고 싶었어.”

그렇게 말하며 무쿠로는 항아리 뚜껑을 열었다. 까만 잿가루가 일렁이는 햇살에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냈다. 한때는 살아있던, 그러나 이제는 온기가 전부 가셔버린 것이었다. 보행객들이 이쪽을 쳐다보았지만 무쿠로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손을 집어넣어 잿가루를 한웅큼 쥐었다. 그리고 팔을 난간 너머로 뻗었다.

허공으로 잿가루가 흩날렸다. 무쿠로가 뻗어 펼친 손을 따라 넘실거리며 강 속으로. 마치 눈가루가 날리는 것 같았다. 잿빛 가루들이 궤도를 달리하며 어느덧 사라져간다. 사라진 무게만큼 항아리가 점점 가벼워졌다. 무쿠로는 료코에게서 등을 진 모습이었지만, 료코는 본능적으로 무쿠로가 울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소리 없는 울음이었다. 정적을 동반한 슬픔이 공간을 잔뜩 메웠다.

그녀의 슬픔이 고스란히 공기를 통해 전해져온다. 공허한 울림이었다. 익숙한, 공허. 세상 속의 공허. 무료함. 지루함. 단조로운…. 그 감정을 전부 호흡처럼 받아들이며 료코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뺨이 젖어갈수록 무쿠로의 손 끝을 따라 점점 더 비어가는 항아리다. 료코는 금세라도 찢어질 것만 같은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가슴 속으로 나지막이 인사했다.

안녕, 또 다른 나 자신.

다른 세상에선 행복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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