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창한 하늘에 수상한 낌새가 드러났다. 구름 한 무리가 슬쩍 고개를 내밀더니, 이내 갑작스럽게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거리에 모인 사람들은 청명한 봄 날씨를 만끽하다 말고 급히 흩어져 저마다 비를 피할 곳을 찾았다. 서서히 떨어지던 물방울은 곧 세차게 내리는 소나기로 변했다.
"꺄악!"
시로가네는 짧게 비명을 지르며 주변에 있는 건물 입구로 다급히 몸을 피했다. 곧바로 뛰어온 덕에 심하게 젖은 곳은 없었지만, 안경 렌즈에 묻은 물방울이 시야를 방해했다. 안경을 벗고 가볍게 흔들어 물기를 털어내던 시로가네는 미간을 찌푸린 채 건물 바깥을 멀거니 응시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맑았던 하늘이 거짓말인 것처럼, 매섭게 쏟아지는 빗줄기는 그칠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시로가네는 힘없이 한숨을 내쉬며 두 팔로 몸을 감쌌다. 내려간 기온과 조금이지만 젖은 옷 때문에 쌀쌀한 기운이 맴돌았다. 아침부터 잃어버린 물건을 찾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나, 계단에서는 다른 생각에 빠져 한눈팔다 발을 헛디딜 뻔하더니, 이제는 멀쩡했던 날씨마저 말썽이다. 오늘은 수수하게 운이 따라주지 않는 날이네, 그렇게 투정을 중얼거렸을 때였다.
거센 빗소리 사이로 누군가 빗길을 급히 달려오듯 철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로가네가 그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희미한 빗줄기 너머로부터 인영이 보였다. 훤칠한 신장과 풀어헤쳐진 장발, 그리고 안경 너머의 두 적안. 곤타 군? 낯익은 실루엣을 인식한 시로가네가 곧바로 떠오른 이름을 작게 중얼거렸다. 멀리서부터 달려왔는지, 같은 건물 입구로 들어온 그의 옷은 푹 젖어 있었다. 늘 매고 다니던 채집통을 바닥에 내려놓은 그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털어내던 그가 문득 얼굴을 들어 시선을 돌렸다. 몇 발자국 정도의 거리를 두고 허공에서 마주치자 시로가네는 순간 짧게 숨을 삼키는 소리를 내었다.
"시로가네 씨?"
그제야 그녀가 있다는 걸 눈치챈 두 눈이 놀란듯 크게 떠진다. 자신을 향한 채 깜빡이는 두 눈앞에서 시로가네는 멋쩍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 곤타 군. 이런 곳에서 마주치다니 우연이네. 평범한 한 마디를 먼저 꺼내자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풀어져 부드러운 웃음으로 변한다.
마찬가지로 비를 피하러 온 거냐던가, 우산을 안 챙긴 것도 피차일반인 모양이라던가. 그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아침부터 햇볕이 따뜻해서, 비가 내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그렇게 말하며 구겨진 옷 소매를 피는 곤타의 옆에서 시로가네는 다시 비가 내리는 건물 바깥으로 시선을 던졌다.
대화가 끊기자 빗소리에 파묻혀 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그제야 드는 생각이지만, 지금은 평소 키보가미네 학원에서 만나던 때와는 퍽 다른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클래스메이트인 만큼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는 일은 일상적이었지만, 지금처럼 교외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것은 또 이야기가 달랐다. 거기다가 어디를 가도 항상 시끌벅적하던 교내와는 달리, 이곳에 남은 건 단 두 사람뿐. 이 사실을 새삼스럽게 자각한 시로가네가 애꿎은 신코를 바닥에 톡톡 부딪혔다. 상대가 친숙한 급우라고는 해도 그만큼 특별하게 의식하고 있는 사람인 이상, 둘밖에 남지 않은 공간에서는 묘한 긴장감을 느끼고 만다.
"시로가네 씨, 괜찮아?"
"으, 응?"
"낯빛이 안 좋아 보여."
바로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시로가네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어느새 바로 옆까지 다가온 곤타가 걱정하는 눈치로 시로가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두 붉은 눈을 마주하기가 무섭게 심장이 요란스러워진다. 빗소리에 파묻힐 게 뻔한 심장 박동이 행여나 새어나갈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전, 오른쪽 뺨을 폭 감싸는 감촉에 머릿속이 하얗게 번졌다. 커다란 왼손이 볼에 맞닿자 괜히 마른 침을 삼키게 된다.
빗소리가 아득해지는 것 같아. 역시 손이 따뜻하구나. 이 이상 저 눈을 마주하고 있으면, 돌이킬 수 없는 말을 해버릴지도 몰라. 시로가네의 머릿속에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올라오는 와중, 곤타의 손끝은 무언가를 망설이듯 주춤거렸다. 몇 시간처럼 느껴지는 단 몇 초. 곤타가 머뭇거리던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을 때였다.
비의 장막을 헤치고 밝은 빛 한줄기가 시선과 시선 사이로 날아 들어왔다. 두 사람이 반사적으로 건물 바깥으로 고개를 돌리자, 파란 하늘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언뜻 내비쳤다.
"…아, 이제 비가 그치는 것 같아! 금방 그치는 소나기였나 봐. 다행이다."
"그, 그렇네. 소나기, 말이지…."
온화하게 미소지으며 손을 떼는 곤타와 달리, 시로가네는 멋쩍게 웃으며 시선을 피해버렸다.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할 때는 한숨을 푹푹 내쉬더니, 이제는 그칠 때도 투덜거리고 있는 모습이라니. 나도 수수하게 제멋대로 구는 사람인 모양이야, 시로가네는 속으로 조용히 자조했다.
풀죽은 기색이 드러난 시로가네의 표정에 곤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한번 입을 열었다가 결국 다시 닫아버린 곤타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는 바닥에 내려놓은 채집통을 다시 집어 들어 매고는 먼저 건물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 그럼 곤타는 먼저 가볼게! 내일 학교에서 보자, 시로가네 씨!"
"응? 아, 그래. 조심히 들어가…."
밝게 인사하는 목소리가 상기된 것 같기도 하고, 잽싸게 멀어지는 발걸음이 조급하게도 보이고. 시로가네는 고개를 저어 그런 의아함을 곧바로 털어냈다. 그리고는 전까지의 쌀쌀함이 무색하게 열이 잔뜩 오른 얼굴을, 정확히는 곤타의 손이 닿았던 오른쪽 뺨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그때 햇빛이 새어 나오지 않았더라면, 조금이라도 더 그 눈을 마주하고 있었더라면. 정말로 말해버렸을지도 모른다. 좋아한다고. 결과적으로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을 내뱉는 일은 없었지만, 아쉬움도 안도도 들지 않았다. 그저 지금 만큼은 가슴 속의 간지러움과 기쁨에 잠겨있을 뿐이었다.
지금은 괜찮아. 어쩌면, 만에 하나라도 어쩌면. 다음에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는….
속으로 되뇌인 시로가네는 건물을 나섰다. 걸음은 날아오를 듯 가벼웠고 올려다본 하늘은 청명하게 개어 있었다. 그녀가 품은 기대를 비추듯.
반면에, 먼저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난 곤타는 걸음을 늦추고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펼쳐 보인 손가락 끝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제대로 바래다주지도 않은 채 먼저 자리를 떠나버리고, 그것도 모자라 숙녀의 얼굴을 멋대로 만지다니. 완전히 신사 실격이야. 뒤늦은 후회를 중얼거린 곤타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으로 동요한 상태였다. 어째서였을까. 시로가네의 눈을 마주하고 있자니 어딘가에 홀린 것만 같은 감각이 밀려왔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자신도 그 무심코 저지른 짓을 이해하지 못한 채였다. 왜 그런 기분이 들었던가, 햇빛에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면 마저 들어 올린 오른손은 어떻게 할 셈이었던가. 그 순간만큼은 물살에 휩쓸리듯 움직였기에, 이제 와서 질문을 던져도 대답을 떠올릴 수는 없었다.
다음날 학교에서 만나면 제대로 사과하자. 짧게 다짐한 곤타는 애써 상념을 떨쳐냈다. 분명히 비는 그쳤는데도 갑작스러운 소나기가 다시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그에게 그 소나기의 원인을 이해할 때는 아직 오지 않았기에, 곤타는 떨림의 이유를 짐작하지 못한 채 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