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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은 소란했다. 외국으로 학업을 위해 떠났던 왕녀가 돌아왔던 탓이다. 노보셀릭 왕국의 자랑이 아니던가. 제 아무리 무질서하고 혼란이 그득한 나라라한들, 그들의 왕녀를 희망으로 삼는 일 정도는 누구나가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임이라. 단정하게 입었던 교복을 벗고, 나풀이는 흰색 자락의 드레스를 입고 왕실의 계단을 오르는 소니아의 걸음소리는 여느때보다 가벼웠다. 때문에 국왕은 어떠한 것들보다도 자신의 딸을 반길 생각에 들떠있던 것이다. 연회장으로 걸음을 옮기는 내내 들리는 말소리들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실수라면 실수였을지도 모르겠다.

 국왕이 발을 디딘 연회장은 고요했다. 흔들리는 샹들리에의 불빛 아래에 선, 백금색의 머리카락을 바람에 나부끼며 선 소니아. 그런 그녀의 흰 드레스자락이 바닥에 끌릴때마다 사락이는 소리가 들렸다. 다만 국왕의 귀에 닿은 것은 옷자락의 소리는 아니었음으로, 그 곁에는 그에게 있어 처음보는, 검은 옷을 입고 스스로를 매어둔 남자가. 그 곁의 뱀이, 쉭쉭이는 소리가 섞여 들리는 것이다.

“아바마마.”

 소니아의 읊는 목소리는 이전보다 나긋했고, 다정했으나 뱀의 음성에 섞여 어딘가 께름칙했다. 단지 낯선 이가 그 곁에 서있기 때문이라 여기고 국왕은 이들을 흔쾌히 반겼다. 정확하게 짚자면 반기고자 입을 열었다. 말이 떨어지지 않는 시점에서 무언가 기이함을 알아채고, 그제서야 뒤늦게 스미는 기시감에 동반되는 공포를 알아차린다. 국왕과 왕비의 시선이 불안하게 소니아를 향하면, 소니아는 아랑곳않는, 심지어는 행복해보이는 표정으로 걸음을 옮겨 다가와 왕녀임을 증명하는 왕관을 바닥으로 버리고는 아버지의 것을 제 머리에 올려보며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것 좀 보세요. 참으로 제게 어울리지 않나요?”

 답이 돌아오진 않았다. 혀가 굳었으니 말소리를 낼 수 없는 것은 자연한 일이었다. 그들을 응시하던 푸른빛 시선은 이내 흥미를 잃고 돌아서서는 검게 휘감은 남자에게로 향한다.

“타나카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왕관, 제게 어울리나요?”


“………”

 남자는 대답을 내지는 않았으나 고개만 두어번 작게 끄덕였다. 이에 그 왕녀의 진심으로 행복한 것 처럼 번지는 웃음이, 태초의 죄를 잉태한 성서의 죄악을 닮았다.

*

 떠올려낸 순간의 것들은 망각의 죄를 함께 동반한다. 애초에 절망이란 무엇을 의미했는가. 그곳에 만연하는 죄를 등에 업지 못하고 무너지는 것을 뜻하노라. 

 잠들어있던 캡슐에서 몸을 일으킨 소니아는 자신의 옷자락의 끝에 묻어있던 피의 주인을 떠올린다. 누구나가 자신을 사랑하던 그녀의 왕국 속에 작은 반란이 일었다면, 그것은 동화처럼. 혹은 지독한 악몽과도 같이…그곳의 가장 사랑받는 이가 모든 것을 저버리고 저 아래로 떨어져버린 우스운 이야기였다. 홀에 울리는 비명소리와, 그 순간에 튀어오른 비릿하고 뜨거운 피. 절망의 굴레라는 것은 으레 한번 발을 디딘 이의 다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들. 졸업을 택하며 보았던 한 순간의 환상 안에서는 누구도 해하지 않은 자신이, 오직 곧은 신념을 지닌 이와 웃고 있었지 않았는가. 의식과 함께 되돌아오는 잔존하는 좌절의 아래에서 소니아는 호흡했다. 낯선 감각은 아니었고, 오히려 익숙했다. 

 가상 공간에서 죽었던 이들은 가사상태에서 돌아오기까지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번 죽었던 뇌를 다시 깨우는 작업은 아무리 가상현실이었다 한들 다소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라는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잔당-소니아는 어떻게 표현하는게 좋을지 한참을 고민했으나, 클래스메이트라고 부르기에는 각자 너무 많은 길을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들은 동의했고, 각자 깨어나길 기다리는 이의 캡슐 곁에서 자리를 지켰다. 카무쿠라만이 설 자리를 찾지 못해 다만 그 곳에 서 한참을 이들을 응시하는 것에서 그친다. 소니아가 향한 캡슐도 정해져있었다. 캡슐 안에서 눈을 감고 누운 이는 매우 평온해보였다. 꿈을 꾸는 것 같아보였다는 말이 맞을 것 같았다.

“타나카 씨…….”

 그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돌이켜보면 대답보다는 행동으로 답을 돌리는 이였다. 이렇게 침묵이 오래도록 절망이 되어 맴돌던 적이 더 있던가. 하나 둘 흘러들어 돌아오는 기억의 사이에서 소니아는 사체에 대고 재잘이며 말을 걸던 자신을 떠올리고, 그 핏자국 위에서 흥에 겨워 춤을 추고, 이에 좌절한 국민들의 앞에서 자랑스레 연설하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어떤 이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에 시간을 절망으로 칭하노라 하였으나, 그 사실에 깊은 후회를 한다면 그것은 온전한 절망으로 보아도 좋을까. 그곳에 모인 졸업생들은 온통 같은 것을 느낀다. 

 


 어떤 동화에서는 깊게 잠든 이에게 입을 맞추면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도 같았다. 허나 그런 이야기가 전승된다 해서 썩어버린 백골에는 몇백번을 입을 맞춰대어도 돌아오는 것이 아니지 않던가. 세상이 모두 동화처럼 돌아가는 것이 아님을 떠올렸다. 이야기는 늘 살아있는 자에 의해 전승된다. 때문에 우리는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고. 이곳에 누운 이의 입버릇이었다. 지독한 절망감에 사로잡힌 나날에는 그가 무어라고 했었더라? 이제 다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그 위를 덮은 유리관에 소니아는 몸을 기댔다.

“당신이라면 그 선택의 순간에도, 삶을 선택했겠죠.”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후회만이 점철되어 남은 삶이 정말로 강자의 것이란 말인가요? 이렇게 의지없이 살아가기만 하는 것은 당신의 이상에 엇나가는 일이 아닌가요. 의문만이 남아 맴도는 공간 안에는 침묵이 남았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이의 답은 돌려받을 수 없음을 알기에 소니아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다음에 눈을 뜰때에는 해답이 있기를 소망했다. 잃어버린 희망 한조각이 되돌아오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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